[인간②]육체와 영혼(정신) - 윤철호(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인간은 다차원적인 존재다. 한 인간 존재는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종교적 차원으로 구성된다. 이 다차원 가운데 물리-화학-생물 차원이 육체적 차원이라면, 심리-사회-종교 차원은 정신적 또는 영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이분법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두 본성, 즉 육체적 본성과 영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 ‘본성’은 영어로 ‘nature’로 번역되는데, 인간의 본성은 단지 정신 또는 영혼과 대립되는 물질이나 육체로서의 ‘nature’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nature)은 물질적, 육체적 요소와 정신적, 영적 요소 둘 다를 포함한다. 이 점이 인간의 본성(nature)이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즉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본성(nature)과 다른 점이다. 즉 다른 자연의 본성(nature)은 정신 또는 영혼을 포함하지 않는 데 반해, 인간의 본성(nature)은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다.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독특성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서구 기독교는 고대교회 이래 인간의 인격이 대립적이고 계층적인 관계 안에 있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실체로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체는 생멸(生滅)하지만, 영혼은 불생(不生), 불사(不死), 불멸(不滅)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 이해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질료인 육체에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전인적 인간을 만드는 생명의 원리로서, 육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그리고 플라톤과 같이, 아퀴나스도 영혼은 육체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죽지 않고 불멸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를 서로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하는 헬레니즘적인 이원론적 인간 이해는 영혼과 육체를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전일적인 성서적, 히브리적 인간 이해와 상충된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이 구절에서 “땅의 흙”은 물질을 의미하고,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느샤마, 니쉬마트 하임, breath of life) 즉 영을 의미하며, “생령”은 살아있는 존재(네페쉬 하야, living being)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아담의 몸에 생명의 호흡 즉 영을 불어넣으니 인간이 살아 있는(animated, enlivened)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 창조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각기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온 육체와 영혼이 결합함으로써 한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이원론적 인간론보다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의 호흡(영)에 의해 육체가 생명력 있는 생명체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 영혼 또는 정신이 육체로부터 창발되었다는 의미에서 현대과학의 창발적 인간론과 공명한다고 할 수 있다.[1]
인간은 육체적으로 다른 동물들과 유사한 생물학적 구조와 본성을 공유한다.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98%가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정신 또는 영혼 안에서 종교성 즉 영적 본성을 갖는다. 육체적 본성은 몸의 출생과 더불어 주어진 본성이며, 영적 본성은 몸의 성장과 더불어 정신이 성숙해감에 따라 창발되는 본성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는 영적 본성, 즉 종교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거나 본성과 모순되는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본성적 현상이다.
몸이 땅의 흙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존재다. 현대 과학은 인간의 인격이 생물학적 요인 특히 유전자에 의해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유전자는 생명 정보로서 DNA 복제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인격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을 DNA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되는 기계로 본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적 사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실상 도킨스 자신도 인간 존재와 행동이 전적으로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에게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침으로써 이기적 유전자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며 또한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 이것은 사회적 차원을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인간 인격이 생물학적 결정론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인간은 정신-육체적(psychosomatic) 존재로서,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매우 심대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이 육체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단정하는 물리학적 또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인격에 있어서 육체와 정신 사이에는 ‘아래로부터 위로’(bottom up)의 인과율과 아울러 ‘위로부터 아래로’(top down)의 인과율이 작용한다. 만일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향식 인과율이 작용할 수 없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은 단지 육체의 욕구에 지배되는 짐승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요인에 의해 심대하게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론적으로 지배되지 않으며, 오히려 육체적 요인을 통제하고 목적 지향적으로 인도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육체적 존재로서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다. 인간은 높은 도덕적, 종교적 특성을 발현하는 선한 행동도 할 수 있지만, 비도덕적, 악마적 특성을 발현하는 악한 행동도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전자를 표현할 때에는 ‘영’이란 개념이 사용되고, 후자를 표현할 때에는 ‘육체’ 또는 ‘육신’이란 개념이 사용된다. 신약성서의 바울은 육신과 영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롬 8:6)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여기서 ‘영’과 ‘육신’이란 개념은 한 인격을 구성하는 두 부분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두 관점을 가리킨다. 즉 ‘영’이란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리키고, ‘육신’이란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의 소욕대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은 잘못된 것이다. 영혼에 의해 선한 인간이 되고 육체 때문에 악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든지 악한 행동을 하든지 모두 정신적, 영적 차원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악한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단지 그러한 행동을 실행하는 육체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이 육체와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또는 영이 인간의 일차적인 주체성과 책임성의 자리이다.
[1] 창발이란 하위체계(부분)로부터 생겨나지만 그 하위체계(부분)로 환원되지 않는 속성을 지닌 상위체계(전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윤철호, 『인간』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pp. 78-89, 352-58을 참고하라.
[2] Richard Dawkins, The Selfish Gen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홍영남 옮김 『이기적 유전자』 (서울: 을유문화사, 2003), pp. 130-33, 그리고 10장, 12장을 참고하라.
* 본 글은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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