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심윤경 작가님의 또 다른 소설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바로, '설이'입니다. 지난번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공은 '소년' 동구였어요. 이번 소설은 '소녀' 설이가 주인공입니다. 설이가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는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나온지 10년이 넘어서 한 독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해요. "선생님, 동구는 행복했을까요?" 이 질문이 작가님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나의 동구는, 행복했을까? 라고 수시로 곱씹으셨다고 해요.
동구는 착하고 속이 깊었고,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도 대신 짊어지는 아이였습니다. 오래된 갈등이 점철된 가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지요. 많은 착한 아이들이 살아가는 것 처럼요. 그런데 작가님은 동구가, 작가님 스스로가 잊었던 것은 그 아이가 어리고 약하다는 거였다고 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의 소중함보다 더 먼저, 그아이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라고 해요. 어쩌면 이렇게 착하고 속이 깊니! 하는 칭찬이 어른들이 아이들의 고통을 계속 외면하고자 할 때 동원하는 교활한 속임수일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작가의 말'에 적어놓으셨더라구요. 동구의 희생과 사랑을 칭송했지만, 그 아이가 행복한지 아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요.
저도 이 질문에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마지막에 들었던 의문이 좀 풀리는 것 같았어요. 저도 책을 읽으면서, 결국 동구는 또 짐을 지는 구나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작가님은 뒤늦게 찾아온 미안함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독자들에게 나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 묵묵히 자기 인생을 내걸어야 한다고, 동구처럼 그래야 한다고 말해버린걸까? 라고 말이죠. 그래서 17년 만에 두 번째 성장소설을 내 놓으신 것이 바로 '설이'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며, 여러 각도로 인상깊었던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소설이 반전이 있어요! 제가 스포가 될 수 있으니... 곧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세요 :)
"알았지 설아? 언제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제일 하고 싶은 것을 해라.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야 몸도 마음도 튼튼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힘든 줄도 모르고 아픈 것도 이겨내거든.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란다. 알겠지?"
- 16쪽
설이가 제일 좋아하는, 좋아했던 의사 곽은태 선생님의 따뜻한 말이에요.
담임은 여전히 나에게 지극한 정성을 쏟았지만
그 물렁한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이미 뻔히 알고 있었다.
- 86쪽
항상 정성을 다하지만, 정작 설이가 필요할 때나, 자신에게 불리하면
자리를 피하는 담임 선생님의 관심을 표현하는 말. 물렁한 사랑. 이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시선으로 이어진 먹이사슬의 끝에 놓인 나는 바라볼 사람이 없다.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었다.
아예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화를 내면 왠지 나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 멋진 곳에서 바닷가재를 앞에 놓고 시현과 시현 엄마 그리고 곽은태 선생님이
서로를 노려보는 이유가 혹시 내가 여기 끼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도 나에게는
음식물 쓰레기통 냄새가 조금쯤 남아 있어서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자꾸 무서워졌다. 그런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면 헤어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정말로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 169 쪽
곽은태 선생님의 가족이 서로 다툴 때, 그 가운데서 자신의 탓을 하게 되는 설이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말해주고 싶었어요. 네 탓이 아니라고.
"네가 그 방송에 나갔기 때문에 갑자기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풀잎보육원은
큰 보육원이 되었어. 그리고 나는 아기들을 돌보고 부엌일을 하면서
작은 월급을 받을 수 있게 된 거야. ... 설아 그건 모두 다 그 기부금과 원장님 덕분이었어.
그게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까지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없었을 거란다." (이모의 고백)
나는 나도 모르게 의미 없는 덧셈과 뺄셈을 무한히 반복하곤 했다. ...
그 모든 덧셈과 뺄셈에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숫자가 바로 이모였다.
한 번도 변한 적 없이 내 곁에 있어서 의미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그 존재조차 의심해본 적 없는 한 사람이었다. 그 이모가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내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다.
- 260쪽
여기서 설이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데요. 설이는 그냥 보육원에 맡겨진 아이였는데, 원장님이 기부금을 얻기 위해 방송국 관계자들과 설이를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구해낸 것 처럼 설정을 하죠. 이것으로 인해, 어딜 가든지 살면서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는데, 결국 그 일로 인해 본인을 제일 사랑하고 본인이 제일 사랑하는 이모를 만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죠. 너무 아이러니한 인생을 일찍부터 마주치게 되는 설이. 원장님에 대한 배신감이나 분노가 이모를 만날 수 있었다는 선물로 상쇄가 되었을까요?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놓고 떠나가듯이 나를 풀잎보육원 앞
모퉁이에 두고 갔을 것이다. 이모와 원장님은 우리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 사람은 악착같이 기부금을 받고, 한 사람은 하염없이 사랑을 주었다. 이제는 그 일이
기분 나쁘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에게도 자식을 키우는 건 몹시 힘든 일이라서
곽은태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조차 완전히 길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그분들께 나를 맡긴 건, 비록 스스로 키우지 못했지만, 좋은 결정이었다.
- 268쪽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설이의 고백. 그 일이 기분 나쁘거나 고통스럽지 않다는 그 지점이 제게는 너무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부모를 바랬던 설이의 우상이었던 곽은태선생님 조차도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설이는 그 완벽하지 못한 어른들을,
그 많은 억울한 시간들이 이해되는 지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때 시현이 악마처럼 사악한 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나처럼 격렬한 어지러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시현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어깨 위의 흔들림을 견뎌야 했던
시현이 나보다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이모는 설날 새벽에 버려진 아기를 사랑했다. 그 아기가 바로 나였다. 그것이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걸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 너무 당연해서
감사하기는 커녕 값없고 하찮게 느껴졌고, 다른 아이들이 가진 젊고 세련된 '진짜' 부모들이 부러워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버이날 감사 편지는 항상 원장님께 썼다. 이모의 몫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모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복잡한 조건법 시제 따윈 없이 나는 그렇게 사랑받았다.
별다른 감사조차 없이 당연하게 받아먹었던 그 소박하고 따스한 사랑이 기적인 걸 이제 알았다.
풀잎 위에서 자란 것도 괜찮았다. 그 풀입을 지키려 애썼던 원장님의 투쟁과 이모의 순박한 사랑,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싫었던 음식물 쓰레기통까지, 그 무엇도 빼거나 더할 수 없이 하나인 것을
이제는 알겠다. 많이 흔들렸지만, 나는 엄마가 내려놓은 그곳에 두발로 섰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꾸 콧대가 높아졌다. 새해 첫날 나는 언제나 얼굴을 찌푸리고 지냈는데,
이렇게 웃으며 맞이한 새해는 처음인 것 같았다.
- 271쪽
설이의 모든 고백의 마무리가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보육원에서 키워졌지만,
자신은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을요. 비록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아니라도
이모로 부터 진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죠.
부모가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이 진정한 부모의 모습인지, 자신을 낳지 않은 이모로부터
도리어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모 때문에 설이는 행복했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적으신 작가님의 생각이 이 책을 정리해주는 것 같아서 조금 적어볼게요.
"설이는 입을 열어 우리 모두가 해야만 했던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진짜 부모의 사랑인지, 부모의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그것 속에 보이지 않는 이기심의 커다란 가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캐물었다. 설이의 집요하고 앙칼진 추궁이 때로는 나 자신의 가슴마저 가차 없이 할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많이 고통스러웠고 여러 번 쓰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설이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할 말을 다 해주었다. 그게 바로 설이다. 어른들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기 위해 손톱과 이빨까지 동원한 설이의 기백과 투쟁에 감사하고, 실은 여리고 상처 많은 그 아이에게 나의 가장 큰 사랑과 응원을 보낸다. "
소설을 읽으며, 이 세상 모든 어린 아이들이 사랑받아야 하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구처럼 순하게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백을 당당히 내세워 어른들의 잘못됨을 꼬집은 설이의 모습 또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어린 시절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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