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추천으로 소설을 한 권 읽게 됐다. 작가의 이름은 심윤경 님이고, 소설의 제목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성장소설이며, 어떻게든 어른들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았던 누군가의 어린시절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했다. 그 지인은 구세주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며 슬쩍 건네주었다. 하하하... 나? 어떻게 알았지? :) 일단, 재밌게 읽었던 이유는 책을 읽으며 문장이 간결하고 묘사가 섬세해서 술술 읽히는 책이었다. 책 뒤에 추천사를 보니, 역시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였다. 그리고 내용도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쳐서 마치 그 현장에 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어린 소년의 눈을 빌려서 가족과 주위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가족에 대한 따뜻하고 세밀한 묘사와 동생과 담임 여선생을 향한 내면적인 감정의 표현 같은 것들이
설득력이 있다. 이 작품이 심사위원들의 눈에 띈 것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가장 문장 수련이 되어 있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성실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작가의 정진과
그가 겪어나갈 작가로서의 삶에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 작품을 기다리려 한다.
- 황석영 (소설가) 의 추천사
이 책을 읽으며, 내 유년시절을 조금이나마 돌아볼 수 있었다. 어린 동구가 겪어야했던 추운 세상, 그리고 따뜻함을 경험했던 아름다운 정원이 한 이야기 안으로 겹쳐졌다. 어른들의 다툼과 불화 속에 난독증이 오고, 일찍 철이 들어버린 동구를 치료해주는 '박 선생님'의 존재는 나에게도 위로를 해 주었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몇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다.
“중요한 건, 동구야,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은, 어른들의 일이라는 거야.
동구 네가 돕고 싶어도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분들은 오랫동안 당신들의 방식으로 살아오셨기 때문에
동구가 아무리 좋은 방법을 알고 있어도 그분들이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또 네가 아버지께 이렇게 해보세요라고 말씀드리면 어린아이가 주제넘게 나선다고
혼이 날지도 모르구. 그러니까 오늘 내가 알려주는 방법은 네 마음 속에 잘 묻어두고
이 다음에 네가 커서 실천에 옮기면 돼. 일단은 동구가 어른들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나 할머니나 엄마에게 늘 힘이 되는 큰아들이 되면 어른들이 정말 기뻐하실 거야.” - 134p
이 대목에서 따뜻한 위로가 밀려왔다. 아이의 한계로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일과 짐을 더 이상 지지 말라는 박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동구의 어려운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여기까지만이었다면 원래 돈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크게 괴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갑작스럽게 신경질이 늘어난 엄마였다. -208p
사실 어렸을 때는 돈에 큰 관심이 없다. 돈에 눈을 뜨기 전, 어린 아이일 때, 말이다. 그럴 때 가장 괴로운 건 역시나, 가족의 화평이 깨져버린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의 여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권력은
정부나 여당이 아니라 군부라구.
이 나라의 18년 군부독재가 박정희 일개인의 똥배짱 하나로 유지되었겠어?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독재의 질서에 익숙해졌어. 박정희가 죽고 나서
부모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봐. 그들은 민주주의를
원치 않고 있어. 누구든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의탁하고 싶어 한단 말이야. 이런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맞닥뜨리게 되면 무능하다느니,
권위가 없다느니, 산만하다느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게 되지. ...
독재에 잘 길들여진 사람들은 또 다른 독재가 자라날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밑거름이야.
이렇게 기름진 밭이 있는데 독재라는 질긴 덩굴이 왜 성장을 멈추겠어? -242p
이 소설에는 단순히 가정 안에서의 사건 뿐만이 아니라, 80년대 과도기의 사회적인 혼란함도 담고 있는데, 주리삼촌과 박영은 선생님, 그리고 대학 선배가 나누는 대화에서 당시 청년들의 고뇌가 담겨 있다.
선생님들끼리 했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옛날에 데모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정결한 달의 여신에게서 숨어 있던
곰보 자국 하나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하필 데모라니. -277p
이 부분은 표현이 참 재밌다. 동구가 사랑하는 박 선생님에 대해서 처음으로 작은 허탈감을 느끼는 부분인데, "정결한 달의 여신에게서 숨어 있던 곰보 자국"이라니... 달이 눈에 선히 그려지는 표현이다.
지금 아버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던 생각했던 절대적인 권위가
오늘날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애써 생각해 낸 위로의 말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할머니가
저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가 한 번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끔찍한 무력함일 것 같았다. -320p
이전 같았으면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를 하시는지 몰라
답답해했을 것이고 어쩌면 반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배운 지금은 아버지의 부적적하고 모호한 표현들이
결국 나에게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혼란스럽고 두려웠으므로 나만이라도 아버지를 괴롭히지 말아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321p
아버지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박선생님의 도움으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조금은 떨어뜨려서 바라보며 이해하기 시작한 동구. 동구가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살아간단다. 네 힘으로 당장 고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네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잘하는 거야. 언젠가 박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지금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만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커서 할 일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벌써 중요한 시간이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네 식구,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손수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선생님의 영상이 맺히기를 기도하며
멀리 있는 선생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생님과 나의 영혼이 어디론가 서로 통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먼 곳에서라도 나의 외침을 들은 선생님이 답을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 그것뿐이었다. -332p
‘동구야, 많이 상심하고 있구나. 대개 이런 일들은 어른들끼리 해결하는 게 맞지만,
어른들이라고 뭐든지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어른들의 해결 방법이 늘 옳은 것도 아니고.
어린 네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임에 틀림없지만 잘 생각해보면 길이 있을 거야.’ ... ‘
누군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는 그 사람이 왜 저러는걸까 하는 생각을 해봐.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지 않겠니.’
행동의 이유를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명심해야 할 새로운 원칙이었다. -334p
여전히, 동구는 가족의 상황에 괴로워했고 해결책을 구하고 있었다. 그런 동구의 꿈에 멀리 떠나버린 박선생님이 다시 나타나서 작은 팁을 주었다. 결국 동구는 평소 엄마를 미워했고, 못살게 굴던 할머니의 행동과 아무 희망 없어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었고, 할머니와 함께 시골로 가기를 결정한다. 여기서 동구가 했던 행동이 또 하나의 구세주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아이에게 괜찮은 일일까. 아니면 그 정도를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작가는 동구가 성장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부분이 궁금했다.
동구라는 아이를 만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년시절에 겪을 법한 상황 속으로 함께 들어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잔잔한 한국 소설이, 성장기의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담은 성장 소설이 읽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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